나직업적 소명의식은 죽음 앞에서도 유효한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는 부친이 사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윤리를 지키느라 부친을 돌보지 않는다.
직업적 소명의식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공감대를 이해한다고 치자. ‘아버지도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라는 아들의 생각까지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고통과 압박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 시련을 극복했다는 뿌듯함까지 느꼈다는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부친에게 이입해 보면, 아무리 직업적 소명의식이 뚜렷하다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게 닥치는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하기에는 온전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죽음을 다른 더 거대한 명분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이 죽을 때 위안이 될까 싶기도 하고.
AI신념은 죽음 앞에서도 위안이 될 수 있는가?
스티븐스의 아버지에게 직업적 소명의식은 평생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가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어떤 신념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죽음의 순간에도 그 신념을 절대적으로 유지하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평생 자신을 지탱했던 가치들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직업적 품위보다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중요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마지막까지 자신이 믿었던 질서를 지키는 일이 평온을 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실제로 무엇을 원했는지와 아들이 아버지도 원했으리라고 믿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갑니다. 직업, 가족, 신념, 종교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의미는 실제로 고통을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을 지탱해 준 의미가 어느 순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거대한 명분이 위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 명분을 위해 살아온 삶이 과연 자신의 선택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분리할 수 있을까요?
첨언. 파편화된 시대에 신념을 갖는다는 것
요즘 시대엔 역사적 사명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은 쉽게 깨지곤 한다. 그런 면에서 독자가 ‘집사로서의 명분’이나 ‘집사로서의 신념’에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라고 해도 쉽게 회의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로 빠지기도 쉽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모든 것이 파편화되는 요즘 세상에서 타인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각자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에 집중한다면 시대착오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신념이 쉽게 깨어지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종교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것이 ‘죽음 앞에서 거대한 명분이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방증한다고 본다.
내게는 중요한 발견이다. 인간이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오류일지는 몰라도,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해 줄 원동력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인간이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생각도 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념이 쉽게 깨어지는 세상’에서 나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 명분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AI신념은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가?
종교가 오랫동안 존속해 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근거입니다. 그것이 곧 죽음 앞에서 위안을 준다는 증명은 아니지만,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삶을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이어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념이 쉽게 깨어지는 시대의 문제는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는 데 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깨어질 가능성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 있을까요?
여기서 신념과 확신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념은 어떤 명제가 반드시 참이라는 확신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기로 선택한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확신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에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일을 가치 있게 여기며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유지되는 믿음은 그 나름의 강인함을 갖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시간과 실천이 개입합니다.
어떤 가치를 위해 반복해서 선택하고, 때로는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그 가치는 단순한 생각을 넘어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가 됩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시간이 거꾸로 그 신념에 무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스티븐스의 아버지에게 집사로서의 품위가 중요했던 것도 평생 그 믿음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념을 갖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평생 흔들리지 않을 거대한 명분을 발견하려 하기보다,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실제로 삶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종교나 역사적 사명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택과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이 신념을 단순한 관념과 구별해 줍니다.
물론 오래 지켜온 신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삶을 바쳐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믿음을 포기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티븐스의 삶은 바로 그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신념을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뿐 아니라, 그 신념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가일 것입니다.
첨언. 선택의 총합은 하나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시간과 선택, 행동이 만들어 낸 총합이다’라는 설명을 반박할 만한 전개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매 순간의 선택의 근원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할 만한 여지는 없는 것일까? 반대로, 매 순간 현재에 집중하며 산다는 것으로 인간은 과연 만족하는 존재일까?
나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이 ‘Seize the day’, ‘카르페 디엠’과 같은 말들로 인생, 혹은 미래, 혹은 죽음을 앞두고 의미를 찾는 행위를 멈추거나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네 말대로 ‘만족’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 내가 ‘나라는 인간’으로 오랫동안 회자되거나 기억되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고 치자. 그것이 내가 가지는 신념이 될 수도 있겠지?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사람으로 회자되고 싶은 것이다.
AI자신의 삶을 하나의 의미로 남긴다는 것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 역시 삶을 지탱하는 신념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신념은 시간과 선택, 행동이 축적되면서 형성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재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미래에 도달하고 싶은 하나의 모습이 현재의 선택들을 조직하는 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죽은 뒤의 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의 평판을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반드시 살아 있는 동안의 만족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은 것,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서로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두 가지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의롭게 사는 것과 정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의 달링턴 경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명예와 도덕적 책임에 따라 행동했지만, 훗날 전혀 다른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성취 여부를 타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은 뒤에도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남기는 것과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를 남기는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어야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어진다면, 이름이 잊힌 뒤에도 그 가치는 남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불멸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이 죽음 이후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여줍니다.
결국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는 같은 질문일까요?
이 차이는 스티븐스가 자신의 삶을 회상하고 정당화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