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나선 이론과 스펙트럼 범주화와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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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나선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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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회적 수용(social acceptance)를 갈망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갈등을 피하고 사회적 수용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관찰한다.

주변 사람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일수록 의견을 표명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반대로 지지가 적은 것으로 지각하면 침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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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나올 경우 사람들은 의견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어떤 의견이 다수 의견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본능을 준통계감각(quasi-statistical organ)이라고 노엘레 노이만이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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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2025년 현재에 딱 맞아들어가진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양산/확대/재생산되는 방식은 20세기에서 예측될 수 없다.

그래서 반대로 다수가 침묵하고 소수가 온라인을 지배하는 방식이 다수 존재하기에, 우린 어렵지 않게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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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견 분위기 지각(준통계감각) 그 자체만을 차용하기로 하고, 그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휴리스틱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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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범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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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스펙트럼으로 인식하는 것은 피로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요즘에 항상 쥐고 산다.

우리는 생각을 언어화하는 시점에서 이미 범주화가 결정되기 때문에,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언어 자체가 이미 세계를 특정 방식으로 자르고 범주화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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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소수/다수를 넘어서서, 범주화되지 않았다면 – 즉, 표현 불가능하거나, 표현 불가능함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과도한 인지적 비용(에너지)을 요구한다면 – 침묵하게 된다.

게다가 스펙트럼적 사고 자체가 ‘우유부단’하거나 ‘비실용적’으로 범주화되면, 그 사고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고 에너지도 많이 들기 때문에 더욱 강한 침묵을 유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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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범주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 할 바탕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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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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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경계를 지적한 비트겐슈타인의 어깨로 올라가,

그 경계 위에서 생기는 오해와 침묵의 다의성에 집중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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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고 말하는 순간, 복합적인 감정이 ‘슬픔’이라는 범주도 강제된다.

누구도 빠르게 “60% 슬프고 20% 안도를 느끼며 15%의 공허함과 묘한 평온이 5% 감지된다”라고 하지 않는다.

표현력의 문제이기보다는 언어 구조의 한계이며,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며,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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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범주화를 통한 의미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너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에너지를 갈취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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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나약함도 회피도 아닐 수 있다.

의견을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권위적일 수도 있음을 자각하며,

빠른 의사결정이 진일보가 아니라 진일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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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치학#커뮤니케이션학#커뮤니티에입장하셨습니다#인지적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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